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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류 발전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가치관의 차이였다. 똑같은 기술의 차이를 놓고도 누군가는 위험하니 규제가 필요하다고 하고, 누군가는 발전하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규제가 없어야 된다고 주장한다. 누가 옳다 그르다를 따질 수 없는 문제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, 어쨌든 수많은 영화, 수많은 매체, 수많은 문화 창작물이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를 다루고 소모해오고 사용해왔다.


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다. 지금 현재도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벌어질 갈등인 것인데, 상황에 따라서는 인종차별과 같은 요소가 섞이기도 한다. 그래... 그게 문제다. 블랙 팬서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이 두가지다.


그러니까 감독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. 대체 이럴거면 이 소재를 왜 쓰는 건가?


이런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이렇게 멍청하게 쓰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는 멍청하다.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좀 강하다 느낄 수 있지만,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단어가 멍청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질 않는다.


아니...모든 영화가 똑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. 우리에게 멍청한 영화가 즐거움을 가져다 줄 때도 있다. 가오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병신 머저리 아웃사이더들의 활극이었고, 데드풀은 로맨티스트라 자처하는 맷집 좋은 멍청이의 원맨쇼였다. 그래도 괜찮았다는 거지. 어떠한 면에서 단점이라면, 어떠한 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다. 어이없고 허무맹랑한 설정이라도 잘 풀어나가면 유쾌함이 될 수 있다. B급 감성이란 표현이 단순한 조롱에서 장르의 재미로 바뀐 시대다. 그러니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똑똑하고 세련될 필요는 없다. 그냥 적당히만 해주면 된다는 거지.


적당히 하랬더니 이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적당~한 소재로 영화를 채운다.

그냥 비브라늄은 짱쎈 금속이라서 와칸다가 짱쎈 테크놀로지를 가지게 되었고(석유, 철, 구리 등등이 가득 묻혀있는 지구 위에서 우리가 몇천년을 살았는데)

그런 짱쎈금속을 먹은 식물을 마셨더니 왠지모르게 어메이징~ 초인이 되어버렸고

슈트 입었으니 적당히 맨몸으로 총알 좀 막아주고 차 좀 부수고 댕기고

하이테크놀로지니까 007처럼 차량액션 한번 해주고

우주선 비스무리한거 있으니 전투기 대전 뿅뿅 해주고

부족전쟁 느낌 좀 나게 대규모 전쟁 좀 해주고

그와중에 마음은 따뜻하지만 표현은 거친 상남자가 한번 도와주고


좋다. 다 좋다. 그럴 수 있다. 왜냐하면 히어로 영화니까. 정말 관대하게 봐줄 수 있을 뻔 했다. 그런데 그냥 볼만하네?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영화를 가장 멍청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블랙팬서와 킬몽거의 대립이다. 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 빌런과 히어로의 대립임에도 불구하고.




대립의 요지는 이거다. 전통을 중시하던 스테레오타입 왕인 블랙팬서, 급진주의적 성향을 가진 신세대 왕 킬몽거. 그런데 가장 민감하고 어려울 수 있는 소재로 내놓은 결과물은 형편없었다. 가히 끔찍하기까지 하다.


영화 보는 내내 고구마를 맨입으로 꾸역꾸역 먹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온다. 아니 얜 제정신인가? 얜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? 얜 또 왜 이래? 아니 진짜 이걸 이렇게? 뻔한 클리셰만 가득한 각본이라면 말도 안 했다. 소재는 이것저것 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힘든 소재를 갖다 부어 놓고, 평범한 각성형 메시아 히어로보다 못한 스토리다. 샌드위치 만들랬더니 참치샌드위치가 나오는 셈이다.


자기들끼리 정치싸움 하면서 삼촌 죽여놓고 아무말없이 걍 집에 가는 왕은 또 무엇이며(비밀을 지키려면 걔를 델고 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?), 흑인들끼리 싸우고 대립해놓고 뜬금없이 백인을 말살하자는 킬몽거는 얜 특수작전하다 머리라도 프라이팬에 몇대 맞았나 싶고, 맞짱 뜨다 져놓고 뒤늦게 엄마랑 동생이 살려내서 돌아가놓곤 아직 안 죽었으니 아직 괜찮아 싸울수있어 그니까 싸우자고 임마 하는 블랙팬서나(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) 한끗차이로 좋을 수 있는 장면을 전부 와장창 깨버리는것도 능력이 아닐까. 쉽게 말하면 이건 고등학생 수준에서나 나올 각본이다. 소재에 대한 고찰이나 철학 없이 그냥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 써갈겨놓은 수준의 각본이란 거다.



삼촌의 죽음엔 조금 더 복잡한 음모가 있었으면 했고, 킬몽거의 동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는 되어야 하는거고, 킬몽거가 왕이 되고 나서 갑자기 홱 돌아버리진 않아어야 했고, 블랙팬서의 부활 이후에는 조금 더 가치관의 대립이 보여줄 말싸움 정도는 있어야 했다. 현실은? 그냥 슈트 입고 피터지게 싸울 뿐이다. 이게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.


킬몽거는 아주 좋은 빌런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. '홈커밍'에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벌처는 큰 거창함이 없었다. 그렇다고 벌처한테 많은 장면을 할당해준 것도 아니다. 단지 그의 온화한 가장의 모습과 냉철한 악당의 모습을 함께 그려줬을 뿐이다. 아니 그정도면 충분하잖아. 아픈 과거를 가졌고, 히어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세상의 부조리에 절망해서 와칸다를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, 그렇지만 계략과 명분을 이용하는 세련된 빌런이 될 수 있었다 이거지. 근데 킬몽거는 왜 갑자기 광인이 되어야 했나. 몇 씬만 바꾸고 몇 대사만 넣었어도 누가 옳은 건지, 누가 맞는건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혼란스러움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. 그럼에도 자기의 가치관을 관철할 수 있는 그런 히어로여야 했다. 대체 가치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히어로가 어딨단 말인가? 네 블랙팬서가 그걸 해냅니다.


어쨌든 킬몽거는 완전 나쁜 놈이야. 얠 이겼으니 어쨌든 좋은거임. 잘됐네 잘됐어~

아 예....그래서요? 문제가 다 해결됐나 봅니다. 예...



액션도 그리 좋진 않았다. 부산의 차량액션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축에 속한다. 특히 여동생과 블랙팬서의 합작품은 꽤 만족스러운 편이었다. 블랙팬서가 차를 기울여서 지나가는 장면이라던가 충격 발산 기술로 차를 박살내는 장면 등등...아주 수려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재밌는 수준은 됐다.


근데 그게 다였다. 대체 이 영화는 어디까지 갈 셈인걸까...따로따로 떼놓고 보면 좋을 수도 있겠지. 근데 슈트히어로면서 왜 슈트액션이 없을까. 이게 마셜액션이냐 뭐냐. 쓸데없는 전투기 뿅뿅은 왜 그렇게 좋아하고 몰입도 안 되는 대규모전투는 또 왜 들어간 걸까. 빌런이랑 히어로가 치고박고 싸워도 모자랄 플레이타임에 대체 왜 그러는 건데? 이유나 들어보자 제발...

마지막 전투도, 그럴거면 기차는 뭐하러 켰냐. 어차피 똑같이 싸우다 칼 꽂고 끝나더만...



적당히 해도 좋다. 히어로 장르라는 미명하에 많은 허술함을 용서해 줄 수 있었다. 이야기가 좀 애매해도 좋다. 개연성이 좀 없어도 채워넣어 줄 수 있다. 액션영화의 묘미는 그게 아니던가. 아니면 매일 보던 그게 그거인 플롯, 그게 그거인 클리셰, 차별화된 게 없는 히어로 영화를 벗어나 다른 시도를 했던 영화들도 있었다. 그럼 그렇게 하면 된다.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액션이 좋아서 재미있었던가. 데드풀이 스토리가 좋아서 재미있었던가.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.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만의 장점이 있어야 한다. 허나 블랙팬서는...감독 스스로 돌아봤을때, 이 영화는 이게 정말 개 쩝니다! 라고 외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지 모르겠다. 적어도 난 그걸 이 영화에서 단 1그람도 찾을 수 없었다. 기억에 남는 장면도 대사도 없었다. 킬몽거의 얄팍한 사상은 머리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만.


적당히 할거면 적당히 하고 필요한 데만 힘을 써라. 그냥 적당주의 영화를 만들지 말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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